[이영세 유학일기 17] 에피소드 2 펜대학 재학 중에 유학생으로 같은 일가 종친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당시 야당대표의 아들로 국제관계론 석사를 공부하고 있었다. 우리 일가는 본이 전의로써 이씨 중에서는 비교적 드물어 사회에서 만나면 반가운 그런 성씨이다. 따라서 같은 일가이기 때문에 그와도 자연히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1. 한번은 그의 부친이 뉴욕에 오신다고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나도 같은 일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만나보고 싶었다. 그분은 자유당시절부터 국회의원을 하고 민주당시절에는 국회국방위원장을 지낸 거물정치인 L 씨였다. 미국 출장 중 마침 5.16이 나는 바람에 정치정화법에 묶여 귀국을 못하고 타의로 망명생활을 하였다. 나중에 풀려 귀국하여 당시 40대기수론의 한 축을 이루어 바람도 일으켰다. 야당대표를 하면서 중도통합론을 내세워 외교에는 여야가 없다며 정부에 협조적이었다. 당시 유신시절이라 그 때문에 오해도 받고 있었다. 2. 뉴욕에 그분이 묵고 있다는 호텔에 도착하니 다섯 명의 야당 국회의원하고 같이 왔었다. 일행 중에는 나중 노태우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N서울대교수도 speech writer의 자격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수인사를
[이영세 유학일기 16] 에피소드 1 유학일기를 마치기 전에 두 개의 에피소드를 소개할까 한다. 1. 첫째는 우리 클래스에 프랑스에서 온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 사람답게 품위가 있고 교양이 있어 미국 학생들 사이에서도 비교적 인기가 있었다. 첫1년이 지나고 보이지 않아 예비시험에 실패한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년 뒤에 캠퍼스에 다시 돌아 왔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하고 왔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녀는 놀랍게도 통일교를 공부하고 왔다고 하였다. 자기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삶에 회의와 방황을 많이 했는데 통일교를 만나 모든 삶의 회의가 사라졌고 확신을 얻었다고 하지 않는가……. 즉 그녀는 무니(Mooney)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무니란 문선명이 창시한 통일교의 교도를 미국사람들이 부르는 별칭이다. 당시 미국 청년들은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반전운동과 히피가 그 대표적인 현상이었다. 2. 그래서 그 정신적 공백기에 통일교가 한때 인기를 끌었다. 특히 아이비 대학에 파고들어 많은 관심을 끌고 있을 때였다. 필라에도 문선명씨가 와서 설교를 하였고 학교 캠퍼스에도 무니들이 통일교를 전도하였다. 나에게도 접근을 하여 호기심에 한번 그들이 살고 있는
[이영세 유학일기 15] "논문을 마무리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이론적인 분석은 비교적 쉽게 끝났다. 당시 제도권에서 금리가 미리 결정된 상태에서 각 경제주체들 즉 도산위험이 있는 투자가(기업)와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은행,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위험을 무릅쓰는 사채업자들이 정부가 통화공급을 확대하면 어떤 behavior를 할지 분석하였다. 문제는 실증분석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데이터는 경제개발 이전의 것은 의미가 없고 그 이후는 시계열이 짧아 통계적 유의성을 가지기 어려웠다. 그리고 고도성장을 하고 있을 때라 대부분의 변수는 다같이 증가하고 있어 서로의 관계가 이론적으로는 부(負)의 관계로 나와야 하는데 실제는 정(正)의 관계로 나오는 수가 많다. 예를 들면 이자율과 투자와는 이론적으로 부의 관계인데 실제는 정의 관계가 나온다. 이자율이 올라가도 투자는 계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 경제주체의 행태방정식을 측정하여도 모델은 예상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모델이 안정적이지를 않아 정책변수를 넣어도 기대한 해(解)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실증분석과정에서 이러한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실러교수는 여러 도움을 주었다. 1. 나는 논문쓰는 대부분의
[이영세 유학일기 14] "로버트 실러 교수와의 만남" 문을 여니 웬 금발머리에 미남형의 젊은 교수가 앉아 있었다. 나는 이름을 얘기하고 브룸필드 교수 소개로 찾아왔다고 하였다. 그는 벌써 브룸필드 교수에게 얘기를 들은 듯 반갑게 맞이하면서 자기 이름은 로버트 실러(Robert Shiller)라고 하였다. 나는 실러교수에게 논문지도교수를 맡아줄 수 없겠는지 정중하게 물었다. 그는 즉석에서 OK를 하였다. 그리고 무엇을 쓰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한국금융시장과 통화정책에 관련된 주제에 대하여 쓰고 싶다고 하였다. 그럼 구상하고 있는 것이 있으면 proposal을 써서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와의 면담은 화요일 오전 11시에 만나 1시간을 잡아 놓겠다고 하였다. 1. 이로써 첫 만남은 간단하게 끝났다. 그와의 1년 반 가까운 매주 회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논문지도교수로서는 나를 처음 지도하게 되었다. 즉 나는 그의 첫 제자가 된 것이다. 그는 나와 나이차가 별로 없어서인지 매우 polite하고 친절하였다. 그리고 성격이 좀 shy한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논문쓰는 전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매주 회동을 쉬는 일이 없
[이영세 유학일기 13] "서울방문, 논문준비 그리고 어떤 어페어" 드디어 서울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김포에 내려 3년 만에 보는 서울은 건물들이 모두 작아보였다. 그 사이 나의 눈이 변해 버린 것 같았다. 아직 학위가 끝나지 않았지만 모친을 비롯한 가족, 친지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그 간의 사정들을 얘기했다. 일을 하고 미국경제가 어려워 생활에 압박을 받는다고…….집에서는 일하느라 시간보내지 말고 논문을 빨리 써서 끝내라고 하였다. 그리고 집에서 보조를 더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러겠다고 하고 만날 분들을 더 만나보고 다시 돌아왔다. 1. 그런데 서울 방문 시 만난 분들 중 이런 일도 있었다. 다시 몇 년 전으로 되돌아가 유학 첫 1년을 마치고 예비시험도 끝내고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5촌 당숙부가 당신이 아는 분 중에 딸이 있는데 인물도 괜찮다고 하니 혹시 관심 있으면 미국서 만나보라고 하며 전화번호를 주었다. 5촌당숙부는 50년대 미국유학을 하신 분으로 내가 대학입학시험을 치를 때 그집에서 기거를 하면서 며칠 지내면서 시험장에 갈때 직접 바래다 주신 분으로 평소 나를 많이 아껴주시던 분이었다. 2. 내가 연락을 했더니 그 부친이 뉴욕 어느 호텔
[유학일기 12] "격동의 미국, 그리고 나" 코스웤이 끝나갈 무렵 미국경제는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었다.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 석유 값이 배럴 당 2불에서 한꺼번에 8불로 올라가버린 것이다. 석유가격은 전후 근 30년 가까이 2불선에서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미국인은 물보다 더 흔하게 석유를 소비하면서 그 넓은 미국전역의 하이웨이를 달리며 레저문화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1. 그만큼 OPEC에 의한 석유가격 전격인상은 충격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그 석유도 구하지 못해 주유소마다 차 행렬이 길게 블록을 가득 채우곤 하였다. 연이어 물가가 폭등하였다. 당시 미국 할머니들은 자기들이 어릴 때 1불로 살 수 있는 구매력으로 30년이 지나 어른이 되어서도 똑 같은 구매력으로 상품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즉 1930년의 물가와 1960년의 물가는 거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20불짜리 그린 백을 들고 식품점에 가면 계산하는 할머니들이 돋보기를 끄집어내어 진짜 달러인지 들여다볼 정도로 가치가 있었고 희귀하였다. 2. 그렇게 안정된 물가가 미국이 60년대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면서 전비 조달하기 위하여 미연방준비이사회가 돈을 찍어내기 시작
1. 둘째 나에게 찾아온 행운은 학교로부터 일부 학점을 면제를 받은 것이다.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20과목을 이수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중 8과목을 면제 받은 것이다. 나에게는 큰 혜택이 아닐 수 없다. 2. 사실 유학 오기 전 한국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하였다. 당시 미국서 학위한 교수가 있다는 S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펜대학 입학당시 석사과정이수를 인정받지 못했다. 사실 당시우리나라 대학원수준은 미국대학에서 바로 인정할 수준이 되지못했다. 강의는 별로 없고 학생스스로 발표하거나 리포트로 학점을 받던 때였다. 나도 유학가기 전 미국서 공부하고 온 분들의 분위기를 맛보기 위해 갔는데 교수들이 바빠서 별로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3. 따라서 과목면제를 받아도 등록금 절약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전공과목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들어야 할 과목이 여전히 많았다. 본래 박사과정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전공과목 두개를 선택하여 전공시험(field examination)을 쳐서 통과하여야만 한다. 나는 전공을 국제경제학과 화폐금융론을 택하였다. 국제경제학은 우리나라가 수출로 먹고사는 개방소국경제(small open economy)이기에 국제경제흐름을
[이영세 유학일기 10] "연구조교를 하다" 예비시험을 통과하고 나니 한결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무엇보다 주위에서 나를 대하는 시선이 우호적으로 많이 바뀐 것을 실감할수 있었다. 특히 학교당국과 교수들이 도와줄려는 마음의 자세를 읽을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겼다. 1. 첫째 학교에서 연구조교의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나는 펜대학에 자비유학생으로 입학허가를 받았다. 물론 중부의 어느 주립대학에서 한 학기 지나고 스칼라십을 고려하겠다는 제의가 있었지만 명문대학인 아이비스쿨의 유펜에서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펜은 사립이라 학비가 만만치 않았고 당시 사정으로 생활비도 비싸 연구조교를 원하였다. 2. 당시 워튼경제예측연구소장인 클라인박사는 나를 직접 불러 시간당 4불의 임금을 책정해 주었다. 시간당 4불이면 partime job으로서는 괜찮은 것이었다. 즉 주 20시간, 월 80시간 일하면 320달러를 버는데 그돈이면 월 생활이 되는 수준이었다. 73년 당시 일주일 먹거리 장만에 20불정도 들었고 아파트렌트가 월 75불이니까 월 필수 생활비는 155불이고 나머지는 잡비나 레저로 쓸수 있는 액수이었다. 3. 나는 훤칠한 키에 전형적인
"1.절대 안 했다고 잡아 뗀다. 2.한 증거가 나오면, 별 거 아니라 한다. 3.별 거 같으면, ‘너도 비슷하게 안 했냐’며 물고 늘어진다. 4.그것도 안 되면, 꼬리 자르기 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지난 2013년 10월 28일 자신의 트위터에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쓴 ‘범죄자들의 변명 기법’이라는 글을 리트윗해 이같이 올렸다. 당시 이 글은 SNS를 통해 삽시간에 퍼졌고 조국이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의 ‘조로남불’, 조국은 과거의 자신과 싸운다는 의미의 ‘조과싸’, 조국의 적은 조국이라는 '조적조' 등 하루가 멀다하고 신조어가 생겨났다. 최근 북한 원전 건설 추진 의혹이 불거지자 한 인터넷 커뮤니티의 네티즌들은 의혹을 대처하는 정부의 모습에 조 전 장관이 리트윗한 이 글을 또 한 번 대입했다. 1. 절대 안 했다고 잡아뗀다 통일부는 지난 1월 29일 "2018년 이후 남북협력사업으로 북한 지역 원전 건설을 추진한 사례는 없다"며 "20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측에 전달한 '한반도 신경제구상'에는 원전이란 단어나 관련 내용이 전혀 없다 공식 발표했다. 이후 이인영 통일부 장관도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지난 23일 적폐청산연대가 전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를 무고 및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로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그들은 국민고발인단을 모집하는 글에 “여비서와 김재련(변호사)이 박원순 시장님을 성추행으로 고소한 사건에서 저들의 주장이 무고이자 ‘미투를 가장한 정치공작’임을 밝힐 수 있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라고 주장한 사실이 뉴스1에 보도되었다. 해당 보도에서는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재판장 조성필)는 준강간치상 혐의로 기소된 전 서울시장 비서실 직원 A 씨의 재판을 진행하면서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냄새를 맡고 싶다’ ‘몸매 좋다’ ‘사진 보내 달라’ 등의 문자를 보낸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가 박 시장의 성추행으로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입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밝혔다”라고 보도했다. 즉 정리하자면, 성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문자 보낸 사실과 성추행으로 인해서 상당한 정신적 고통이 발생한 사실을 형사 사건들을 다루는 법원에서 인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질문은 “국민으로서 범죄에 대해 고발할 권리는 이제는 유효하지 않은 것인가?”가 된다. 특히 성범죄 같은 범죄는 단순히 물리적인 피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