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세 유학일기 9] "박사 예비시험 (preliminary examination)에 합격하다" 이윽고 첫 해 첫 학기가 지나가고 둘째 해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은 닉슨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였으나 워터게이트사건이 불거져 시끄러웠다. 캠퍼스에서는 미국학생들이 닉슨은 사기군(crook)이라며 아주 싫어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데 한 눈을 팔 겨를이 없었다. 이번 학기 지나면 박사예비시험 (preliminary examination)을 치러야 되기 때문이었다. 1. 예비시험은 수업한 두 학기 네 과목에 대해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즉 거시경제학, 미시경제학, 성장이론, 후생경제학 등 경제학의 핵심이론에 대해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여기서 평균 반이 잘려나간다는 얘기를 듣고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따라서 2학기도 첫 학기와 다름없이 긴장하면서 수업에 임하였다. 2학기 성장이론 첫 시간이었다. 웬 새파란 젊은 친구가 교단에 올라왔다. 나는 조교이려니 생각했다. 생김새가 아인슈타인을 방불케 하는 곱슬머리에 천재 형으로 생겼다. 키는 나지막하고 머리는 크고 약간의 사팔뜨기같이 보였다. 낡은 가방을 들고 올라와 조교인줄 알았는데 그는 자기
[이영세 유학일기 8] "유펜 한국유학생에 대하여ㅡ" 유펜에는 한국유학생이 상당수 있었다. 대학원에는 거의 대부분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로 약20여명 있었고 학부에는 이민온 교포자제분들과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학원에 온 유학생은 주로 학교장학금이나 어느 기관의 장학금을 받아온 유학생이거나 아니면 자비유학생이었다. 자비유학생의 경우 당시 비싼 사립대학에 보낼 정도로 유복한 학생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부인이 현지에서 일을 하여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경우 와이프 스칼라십을 받는다고 농담삼아 얘기했다. 1. 학부유학생 중 이민온 교포자제들은 서울에서 온 유학생과 잘 어울리지 않아 인원파악이 안되었다. 서울에서 학부로 바로 온 유학생은 집안이 아주 유복하거나 고위층의 자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에도 외무부장관 아들, 한진그룹 조카, 대기업오너 자제 등이 있었고 인근 대학에는 국회의원 딸 등 권문세가 자제가 많았다. 인근학교로는 커티스(Curtis)음대가 있어 당시 정경화, 강동석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다. 미국학생들도 상위중산층의 자제가 많아 자연히 유학생의 분위기는 보수적이었다. 2. 나는 앞서 말한 고교동기가 두 명이나 있어 아주 편
[이영세 유학일기 6] "펜실베니아 대학(유펜) 단상" 유학 와서 첫 시험인 중간시험을 무난히 끝내고 나니 한숨 돌리게 되었고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펜은 동부의 8개 Ivy school 중 하나로 벤자민 프랑클린(Benjamin Franklin)이 세운 미국 첫 종합대학교라 하였다. 하바드대학교가 제일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그것은 단과대학 즉 칼리지로서 제일 오래된 학교이고 종합대학교 즉 유니버시티로는 유펜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1. 아이비스쿨은 동부 8개 사립대학을 부르는 별칭으로 하바드, 예일, 프린스턴, 펜실바니아, 콜럼비아, 코넬, 다트마우스, 브라운대학 등이 이에 속한다. 아이비스쿨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대학으로 건물 벽에 담장이가 쳐진 대학이라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2. 벤자민 프랑클린은 미국 독립당시 유명한 정치인, 외교관에다 피뢰침을 발명한 과학자로서 미국 100달러 지폐에도 초상화가 새겨진 미국인이 자랑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래서 학교 건물마다 벤자민 프랑클린이 설립한 대학이란 간판이 붙어 있다. 그만큼 벤자민 프랑클린이 설립한 대학이란데 대해 자부심이 강하다. 3. 내가 다닐 당시 마이어슨대학총장이 교명을 Univers
* 서강대 교수를 지냈고, 1972년에 펜실베니아대에서 유학했던 이영세 박사님의 유학기를 싣습니다. 1970년대 미국 유학 시절의 단면을 이해함과 아울러 한 개인의 유학기를 통해 통해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영세의 유학일기 1] "1972년 유펜으로 유학길에 오르다" 1. 코로나19와 장마가 오래 계속되니 자연 옛날 생각들이 자꾸난다.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그래도 유학시절이 제일 행복했던 것같다. 꿈이 있었고 장래 무언가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같은 희망과 자신감이 넘칠 때였다. 나는 1972년 내 나이 26세때 미국 유학을 갈 행운을 가졌다. 당시 김포공항에서 많은 친지들이 전송나온 가운데 보잉727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바니아대학 대학원에 입학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도쿄ㅡ하와이ㅡ로스엔젤리스ㅡ뉴욕ㅡ필라델피아를 경유하는 긴 여정에 오른 것이다. 난생 처음 나가는 외국이었고 비행기도 처음 타보아 그 때의 흥분을 지금도 잊을수가 없었다. 2. 내 옆에 머리기름이 반지르르한 깔끔한 일본 중년신사가 앉아 있었다. 일본상사의 중역이라고 했다. 날더러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미국 유학가는 길이라고 하니 그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