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쿠데타 이후 양곤에서만 시위대 59명이 숨지는 최악의 유혈 참사가 발생한 다음 날인 15일에도 6명이 희생되는 등 미얀마 군경의 무자비한 진압이 이어졌다. 이날 오전부터 휴대전화 인터넷(모바일 인터넷)이 끊긴 가운데 양곤 지역에 계엄령이 추가로 선포되는 등 곳곳에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로이터통신과 AFP통신에 따르면 이날 군경의 발포로 시위대 최소 6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얀마 중부도시 밍잔에서는 여성 한 명을 포함해 시위대 3명이 총에 맞아 숨졌다. 한 주민은 "군경이 총을 쏴 사망자가 발생했고, 부상자들을 길거리에서 구출해야 했다"고 전했다. 트위터에는 밍잔에서 이날 총격으로 숨진 여성이 늘 시위대 선봉에 서던 '용감한 시민'이라며 생전 사진과 사망 사진이 함께 올라왔다. 또 다른 도시 마궤에서도 목격자들이 "시위 현장에서 남성 두 명이 숨졌다. 한 명은 가슴에, 다른 한 명은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만달레이에서 언론인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도 잇따랐다. 이밖에 SNS에는 발코니에 서 있다가 실탄을 맞은 여성의 사진, 한 청년이 총상으로 병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저항의 상징인 '세 손가락 경례'를 하는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사망하기 전 "이 파고는 넘기 힘들 것 같다"는 등 성추행 피소를 의식한 듯한 발언을 주변에 여러 차례 한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북부지검은 30일 박 전 시장 성추행 관련 피소 사실 유출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박 전 시장이 지난 7월 8일 임순영 서울시장 젠더특보를 통해 '구체적 내용·일정은 알 수 없으나 피해자의 고소와 여성단체를 통한 공론화가 예상된다'는 취지의 말을 전해 들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박 전 시장은 그 이튿날 아침 고한석 전 비서실장과 공관에서 만나 "피해자가 여성단체와 함께 뭘 하려는 것 같다. 공개되면 시장직을 던지고 대처할 예정"이라며 "고발을 할 것으로 예상되고 빠르면 오늘이나 내일쯤 언론에 공개되지 않을까 싶다"고 밝혔다. 다만 박 전 시장은 피해자가 이미 경찰에 성추행 혐의로 고소장을 제출한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 같은 언급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검찰은 밝혔다. 박 전 시장은 고 전 실장과의 대화가 끝난 후 이날 오전 10시 44분께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는 메모를 남긴 채 공관을 나왔다. 또 집을 나서 북악산 쪽으로 이동한 이후인 오후 1시 24분께 임 특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 경위를 수사하기 위한 휴대전화 디지털포렌식이 4개월여 만에 다시 시작됐다. 경찰이 박 전 시장의 휴대전화를 다시 살펴보게 되면서 수사가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18일 경찰은 경찰청 포렌식 관련 부서에 보관 중이던 박 전 시장 업무용 휴대전화기의 분석을 전날 재개했다고 밝혔다. 포렌식 작업은 유족 측과 서울시 측 대리인들이 참관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분석 작업과 선별 작업을 남겨두고 있다"면서 "진행 상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밝히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 휴대전화는 박 전 시장의 시신과 함께 발견된 유류품으로, 경찰은 지난 7월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해제하는 등 포렌식에 착수해 휴대전화 속 정보가 손상되지 않도록 통째로 옮기는 이미징 작업까지 진행했다. 그러나 유족 측이 법원에 포렌식 중단을 요청하는 준항고를 내면서 일주일여 만에 중단됐다. 5개월 가까이 중단됐던 포렌식 작업은 서울북부지법이 이달 9일 준항고를 기각하면서 재개가 가능해졌다. 유족 측은 기각 결정에 대한 이의 신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경찰은 박 전 시장의 성추행을 비서실 관계자 등이 방조했다는 의혹을 푸는 데도 휴대전화 포렌식 자료를
'주가는 50배로, 시가총액은 500배로'.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를 이끈 27년 간 삼성전자의 눈부신 약진을 압축한 수치다. 25일 삼성전자와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이 1987년 11월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했을 당시 삼성전자의 주가(이하 보통주 기준)는 2만7천원대였다. 시가총액도 4천억원대로 국내 증시 시총 순위는 한국통신, 포항제철(현 포스코) 등에 밀려 10위권에 불과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삼성전자는 가전시장에서 금성전자(현 LG전자)에 밀려 2인자에 가까웠다. 1987년 연간 매출은 2조3천813억원,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1천127억원, 345억원에 그쳤다. 삼성전자를 가전업체에서 지금의 세계적인 정보기술(IT)업체로 도약시킨 최대 원동력은 이 회장이 주도한 반도체 사업 진출이었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 경영 일선에 나서기 이전인 이미 1974년 한국반도체를 사재로 인수하면서 반도체 사업의 발판을 마련했다. 취임 직후인 1988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삼성전자에 합병시킨 것을 시작으로 1992년에는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하며 세계 반도체 시장의 강자로 부상했다. 특히 회장 취임 5년 차인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