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인 조은산이 10월 20일 이른 새벽에 올린 '한양백서'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 조은산 한양백서 전문 ]
청계천이 범람했다. 오간수문이 막혀 물길을 열어내지
못한 청계천은 제 기능을 상실했고 인왕산과 북악산, 남산의
지류를 감당하지 못해 울컥댔다. 준천을 실시해 물길을
넓히고 유속을 보전한 수치 사업은 원점으로 회귀했고
배출구를 잃은 인간의 욕구는 똥 덩어리가 되어 수면 위를 덮었다.
똥 덩어리들은 농밀하게 익어갔고 코를 찌르는 냄새가
동십자각까지 퍼져나갔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는 똥물에
질척여 인마의 수송이 불가한 듯 보였으나 육조판서들의
가마는 똥 구덩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제 갈 길을 찾았다.
동십자각 위의 병졸들은 똥물이 두려워 교대를 미뤘다.
꽉 막힌 수문은 ‘어느 누가 막았는가’의 책임론을 넘어서
‘어떻게 열 것인가’의 방법론으로 전개되는 듯했다.
실증론에 입각한 학자들에 의해 오간수문의 파쇄가
논의되었으나 그 해, 좌인은 우인을 압도했고 기가 뻗친
조정 대신들은 똥물 위에 토사물을 덮어 악취를 상쇄하자는
‘토사물 3법’을 발의했다. 사상 초유의 법안에
시류에 정통한 논객들이 앞다퉈 성문에 벽서를 붙여 댔고
민초들은 웅성대고 또는 웅얼대며 벽서를 훑었다.
어느 논객은 ‘조정이 똥물을 안 치우는 이유’라는
제하의 벽서를 통해 조정의 야비함을 폭로했다.
왕권의 배척점에 섰던 어느 대신은 경제학에 능통했고
'토사물 3법’의 부당함을 역설해 조정의 무능함과 정책의
모순성을 비판했다. 성문 앞의 민초들은 질색해
“과연 옳다 뿐인가.” 탄식하며 벽서를 필사해 여기저기
퍼 날랐다.
그러나 결국 나라는 똥물 위에 겹친 토사물에
점령되었고 내음은 합쳐 무르익어 더욱 고약했다.
도성 안의 똥물은 해를 넘길 듯 이어졌고 어느 순간,
시대의 변혁에 앞서 감내해야 할 덕목으로 탈바꿈했다.
백성들은 똥물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고약함과 역겨움을
‘본디 그러한 것이다’ 정도의 내면적 합의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본디 그러했던 청아한 것들’ 은 잊히게 됐는데
그 과정은 서럽고도 유연했다.
왕권을 노리던 어느 대신이 똥물 걱정 없이 평생 살 수 있는
‘조정의 기본 주택과 기본 소득’을 내세우며 백성들을
다독였는데, 들어찬 똥물에 집을 잃고 치솟는 임대료에
임차인의 신분조차 누리지 못한 백성들은 그의 말에
광적으로 몰두해 빠져들었다.
그의 격문이 반포되던 날, 저잣거리에 모인 백성들은
똥물을 뒤집어쓴 채 감격했고 이제야 어둠을 밝힐
빛이 땅에 내린 것이라며 울부짖었다.
멀찌감치 지켜보던 한 서생이 백성들 앞에 나서며
이와 같이 말했다.
"나라의 재정은 그 끝이 정해져 있소. 누군가가 공짜로 밥을 얻어먹는다면 누군가는 곡식을 털어 나라에 바쳐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이 땅의 아들딸들이 갚아내야 할 것이외다. 빼앗는 자가 있는데 어찌 빼앗기는 자가 없겠소이까. 여기 자신이 빼앗기지 않고 공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모두 손을 들어 보시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든 백성이 제 손을 번쩍 들어
치켜세웠고, 서생은 “과연 사람을 홀리는 것은 공짜 밥과
공짜 술뿐이로다. 듣던 대로 그는 뱀처럼 교활한 자로구나.” 라며 허탈하게 웃더니 자리를 떴다.
조정의 구휼미는 동이 났고 역병 아래의 소상공인과 노약자, 취약계층의 아동들은 결국 관아 앞에서 발길을 돌렸는데, 그날 밤, 만백성이 배를 두드리는 태평성대의 날이 도래했다며 취객들은 고성방가했다. 민촌의 개들이 컹컹 짖으며 응수했고 밤새 소란스러워 백성들은 잠을 설쳤다.
토사물 3법은 결국 어느 대신이 예언했던 대로 전세 시세를
바짝 추켜올렸다. 집주인들은 세입자를 내보내지 못해 안달이었고 백성들은 폭등한 전세 시세에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토사물 3법을 입안했던 호조판서가 가장 먼저 토사물에 갇혀 허우적댔는데 백성들은 이를 두고 자승자박이라며 조롱했다. 진정한 지옥 불은 갱신계약권이 소멸한 이후에 펼쳐질 요량으로 낮게 도사려 화기를 억눌렀다. 도성의 밤은 음산했고 깊이 시려 아리었다.
가을에 이르러, 천정부지로 치솟던 한양의 집값은 결국
신고가를 갱신하고 말았다. 똥물이 닿지 않는 고지대에
거처를 마련했던 어용 대신들과 더불어 지지자들은 큰
시세 차익을 거뒀고 세간살이를 늘려 거처를 옮길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똥물에 젖은 세간살이를 내버릴
처지의 백성은 독주를 털어 넣고 술기운에 잠이 들었다.
그러나 어떤 누구도 스스로 나서 똥물을 걷어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양의 백성들은 이미 타성에 물들었고
똥물에 길들어 순응한 지 오래였다.
갑주를 걸친 기병들이 환도를 절그럭거리며 성문을
드나들었다. 흙먼지를 추적하던 초병이 적국에 잠입해
정보를 캐던 세작의 복귀를 알렸고 기병들이 이를 호위해
병조 관아 앞에 당도했다. 족하에 꿇어앉은 세작이
거친 숨을 내몰며 겨우 말했다.
"급보요. 적국이 열병식을 개최했소. 기름 친 병장기가
거대한 물결을 이뤘고 전마가 앞뒤로 꼬리를 물어
그 끝이 보이지 않았소. 신형 신기전을 앞세웠는데,
그 위용이 하늘을 찌르는 듯했고 사정거리는
이미 동맹국의 영토를 노린다 하였소이다."
세작의 소상한 보고에 나라는 발칵 뒤집혔고 민심은
얼어붙었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들은 신무기의 공포보다
적국 왕의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 이라는 언사에 극심히
감격했고, "과연 계몽 군주로다!", "종전선언만이 답이올시다!" 라며 입에서 침을 튀기고 무릎을 쳐대며 외쳤다.
격심한 그들은 왕명을 받아 조정의 입장문을 작성했는데,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 승정원에 모여 앉아 논의한 끝에
결국 '유감을 표명한다.', '자제를 촉구한다.', '엄중히 경고한다.'
는 문구 대신 '주목한다.'라는 표현으로 그 끝을 장식했다.
대신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중의적 표현이니 이는 모두
그대들의 공이오." 라며 술잔을 기울여 서로를 필봉을 추켜세웠다.
왕이 역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그때쯤이었다.
쥐구멍의 울음소리로 시작한 소문은 산천의 메아리가 되어 퍼졌다. 의금부는 촉각을 곤두세웠고 소문의 끝을 역추적해 병졸을 풀었다. 곧 소문을 퍼트린 자가 체포되었다는 보고가 올랐고 사안의 엄중함을 고려해 종1품의 의금부 판사가 나서 친히 국문에 임했다.
봉두난발을 한 백면의 서생이 포박되어 끌려왔다. 낯이 익었다. 이 자는 필시 며칠 전 저잣거리에서 재정을 운운하던 자가 맞으렷다. 의금부 판사는 복대를 끌어 올려 심기를 다잡았고 이내 하문했다.
"감히 전하를 역병에 걸린 환자로 둔갑시켜 능멸한 것이 네 놈이더냐."
"아니오. 왕은 역병에 걸리지 않았소."
'그렇다면'으로 되받은 판사의 말을 '그러나'로 끊어낸 서생은
살아서 모든 것을 토해내겠다는 듯 길게 말을 이어갔다.
"왕은 역병이 아닌 북병(北病)에 걸렸소.
백성이 불에 타 죽어도 北, 적국이 도발해도 北,
신무기를 개발해도 北이니 과연 북병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이것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중병(重病)이오, 나라의
앞날을 망치는 복병(伏兵)이니, 이는 역병(疫病)보다 더한
천하의 몹쓸 병이외다. 내 말이 틀렸소이까."
서생은 이죽대며 빈정거렸다. 차마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판사는 등을 돌려 국청을 빠져나갔고 이내 어명을 담은
교서가 의금부도사를 거쳐 하달되었다.
서생의 입은 아교로 칠해져 봉인되었고 전옥서로 이송되었다.
투옥되던 날, 짚의 누린내는 코를 찔렀고 그의 옆자리에는
백발의 노인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는데,
그의 목을 감은 칼에는 그의 죄상이 낱낱이 적혀있어 낯 뜨거웠다.
- 왕은 공산주의자다. 라고 발설한 명예훼손의 죄 -
노인의 입 또한 아교로 봉인되어 있었는데, 노인은 겨우
복심으로 꿀렁대 그 뜻을 전해왔다. "나는 아직 2심일세."
서생은 막힌 입 대신 콧구멍으로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청천이 바래어 황천이 되었음에 백로는 날아올라
궤적 속에 명확했고, 보름달은 빛을 잃어 기울었는데,
별은 깊어 그 자리에 형형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물은 제 형태와 본질을
수시로 바꿨고 위정자들은 그를 좇아 가면을 뒤집어썼는데,
불변의 가치는 백성들의 눈 안에 담겼으니 그것은
정의인 것이라 누군가가 말했다.
그 해, 정의는 이 땅에 살아 숨 쉼이 버거웠는지
잠시 숨을 골랐는데, 그 사이 조정 전체를 손아귀에 넣은
형조판서는 관아 곳곳에 제 심복을 깔아 배치했고
관아 명판에 '공정과 정의'를 깊이 새겨 안도했다.
똥물에 갇힌 백성들은 정의(正義)의 정의(定義)를
'시시때때로 변하는 우리들만의 것' 이라 정의했고,
똥물을 뒤집어 쓴 자와 똥물을 피한 자가 한데 뒤섞여
아우성쳤다.
서생은 고개를 들어 창살 너머를 내다보았다. 달은
기울었음에도 절반의 빛을 오롯이 내뿜고 있었다.
한양에 비가 내렸다. 그러나 똥내음을 지워내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