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89) 전 대통령이 5·18 헬기 사격 목격자인 고(故)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았다.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범죄 사실은 형식일 뿐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 여부가 재판의 최대 쟁점이었다.
재판부는 이 판결을 통해 5·18 민주화운동 기간 자국민을 향한 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고 명예훼손의 고의성도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전씨는 사죄 표명 없이 법정에 출석해 재판 내내 조는 모습을 보였고, 일부 5·18 유가족은 형량이 가볍다며 통곡했다.
◇ 5·18 헬기 사격 인정…근거는?
광주지법 형사8단독 김정훈 부장판사는 30일 201호 형사대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전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쟁점이었던 1980년 5월 21일과 27일 각각 500MD 헬기와 UH-1H 헬기의 광주 도심 사격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재판부는 "헬기 사격을 직접 목격한 증인 8명의 진술은 충분히 믿을 수 있고 객관적인 정황도 뒷받침됐다"고 설명했다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가 작성한 경고문과 광주 소요 사태분석 교훈집에 1980년 5월 22일 오전 '공중 화력 제공', '유류 및 탄약의 높은 소모율'이 기재된 점도 500MD에 의한 사격이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판단했다.
또 "광주에 출동했던 군인들은 대체로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일부는 검찰 조사에서 헬기 사격을 지향하는 진술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전씨의 지위와 당시 그가 보여준 행위를 종합하면 미필적이나마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고인을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로 표현했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전씨의 회고록은 자신에 대한 확정판결을 반박하려고 작성했다"며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는 조 신부의 표현의 자유가 자신의 입장을 유리하게 반박하려는 자유보다 우위에 있다고 재판부는 부연했다.
◇ 재판부의 고심 묻어난 '집행유예' 양형 사유
검찰은 지난 결심공판에서 전씨에게 징역 1년 6월을 구형했다.
사자 명예훼손죄의 법정형 기준은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이다.
재판부는 "전씨는 재판 내내 한 차례도 성찰하거나 사과하지도 않아 특별사면의 취지를 무색하게 했다"며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피해자를 비난하는 회고록을 출간해 비난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재판이 5·18 자체에 대한 재판은 아니다"라며 "피해자가 침해받은 권익의 관점에서 판단했다"고 실형을 선고하지 않은 배경을 설명했다.
특히 전씨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것은 재판부의 양형 재량에서 벗어난다고 설명했다.
벌금형의 경우 최고 500만원을 선고할 수 있는데 전씨가 추징금을 내고 있고 이 재판과 관련해 민사 소송에서 손해배상도 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사정을 참작했다는 점을 밝혔다.
재판부는 "집행유예 기간 전씨가 5·18 왜곡을 못 하게 하는 게 타당해 보인다"고 말했다.
◇ 5·18 책임 묻자 '묵묵부답'…재판정에서는 '꾸벅꾸벅'
피고인 신분으로 이날 세 번째 광주의 법정에 출석한 전씨는 아무런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서울로 돌아갔다.
전씨는 법원 청사에 들어서는 동안 '5·18 책임을 인정하느냐' 등 취재진 질문에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법정동 2층 증인지원실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은 전씨는 법정 내부에서는 시종일관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였다.
재판부가 이름과 생년월일을 물을 때 "맞습니다"라고 분명한 어조로 답변한 전씨는 공소사실 낭독이 시작될 때부터 눈을 감고 졸았다.
도중에 잠시 고개를 들기는 했지만, 전씨의 조는 모습은 재판부의 형량 선고 때도 이어졌다.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것으로 알려진 전씨는 지난해 3월 첫 출석과 올해 4월 두 번째 출석 당시에도 신원 확인 이후 조는 모습을 보였다.
전씨는 광주 법정을 오가면서 논란을 일으키는 발언도 남겼다.
첫 출석 때 '발포 명령을 인정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왜 이래"라며 대꾸했고, 이날은 연희동 자택을 나서면서 시위대에 "말조심해 이놈아"라고 고함쳤다.
◇ 전두환 유죄 판결에 의의…"형량 아쉬워"
5·18 단체는 이날 오후 법원 앞에서 전씨의 법정 구속 등 재판부의 엄벌을 촉구했다.
5·18 단체가 제작한 가상 판결문을 통해 사자 명예훼손 법정 최고형인 징역 2년을 선고하고, 죄수복을 입고 포승줄에 묶인 전씨 역할의 남성을 쇠창살에 가두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재판부가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을 두고 고소인인 조영대 신부와 법률대리인인 김정호 변호사는 "전씨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며 헬기 사격을 인정한 판결에 의미를 부여한다"며 "사필귀정의 판결을 내린 재판부를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다만 "반성하는 기색도 없는 전씨에게 내려진 판결치고는 형량이 낮아 너무 아쉽다"고 지적했다.
80년 5월 항쟁 당시 가족을 잃은 오월 어머니들은 결과를 듣고선 "아들을 잃은, 남편을 잃은 엄마의 마음은 어디서 보상을 받아야 하느냐"며 땅을 치며 통곡하기도 했다.
전씨는 오월 어머니들이 지키고 있는 도로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며 물리적인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전씨가 출석할 때 타고 온 승용차가 법원을 빠져나가자 일부 시민들이 차량을 가로막고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퍼부었다.
이 차량에는 전씨가 타고 있지 않았다.
일부 5·18 관련 단체 회원들은 경찰이 철제 펜스를 이중으로 설치하는 등 전씨를 과잉보호했다며 광주지방경찰청을 항의 방문하기도 했다.
◇ 검찰·전두환 측 항소할까 주목
검찰과 전씨 측은 재판부의 판결을 받아들일지, 불복하고 항소할지 여부를 이번 주 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검찰은 판결 이유 등을 분석해 항소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헬기사격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이 내려진 만큼 전씨에게 내려진 형량이 너무 적다는 게 검찰의 항소 이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씨의 민사·형사 소송을 맡은 정주교 변호사는 판결을 납득할 수 없다면서도 항소 여부에 대해선 즉답을 피했다.
그는 "재판장이 말한 사실관계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라며 "항소 여부를 아직 제가 판단할 상황은 아니지만, 판결문을 면밀히 분석해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동안 재판 과정에서 500MD 무장 헬기가 광주에 도착한 게 1980년 5월 22일이라고 파악했는데 어떻게 전날 조비오 신부가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판단할 수 있느냐"며 "논리적 모순점들을 규명하지 않은 비약된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광주=연합뉴스) 장아름 박철홍 천정인 기자 areu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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